퀵서비스 14년차 기사 김길주(40)씨는 2주에 한 번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거의 매일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있다. 2012년 겨울 서류 배달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를 달리다 눈길에 미끄러져 오른쪽 발목 부분 촛대뼈(정강이뼈)가 부러진 후유증 때문이다. 당시 밤길에 좌회전하면서 가변차로로 들어서다 얼어붙은 눈더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지난 25일 만난 김씨는 “건물 관리인들이 눈을 쓸어 가변차로 쪽에 쌓아놓는 경우가 많아서 가변차로로 달리는 오토바이 운전자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 서울 등 중부지방에 올겨울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리면서 볕이 잘 들지 않는 이면도로와 골목길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 길들은 겨우내 녹지 않는다. 오토바이로 생업을 유지하는 이들에겐 이제부터가 혹독한 ‘진짜 겨울’이다.
눈이 오면 처리할 수 있는 일감이 절반으로 준다. 하루 10만원에서 5만원 이하로 벌이도 뚝 떨어진다. ‘퀵서비스’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기동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평소엔 서울 시내를 시속 80~100㎞로 내달리지만, 눈이 오면 시속 30~40㎞가 고작이다. 두껍게 껴입은 옷 때문에 몸도 둔해진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4~5층을, 평소엔 서류박스 세 개를 들고 한 번에 올라가지만, 이런 날은 나눠서 두세 번 오르내려야 한다. 이런 날은 되도록 전자제품 배달은 피한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을 싣고 가다 혹시라도 빙판길에 미끄러지면 파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2년 전에 동료 기사 한 명이 스마트폰 10개를 싣고 가다 눈길에 미끄러져 다 파손됐는데, 600만원을 물어냈다”고 말했다.
제설제로 뿌리는 염화칼슘도 오토바이 운전자들에게는 빙판길 못지않은 공포의 대상이다. 해가 떨어지면 염화칼슘이 땅에 얼어붙어 오토바이를 흔든다. 김씨는 “차라리 비가 내려 염화칼슘이 씻겨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눈 오는 날, 김씨처럼 안경 낀 퀵서비스 기사들에겐 터널마저 ‘난코스’가 된다. 공기가 차가운 터널 바깥에서 차량들의 열기로 후끈한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안경에 김이 서리기 때문이다. 시야가 뿌연 채로 달리다 코앞에 자동차가 있는 걸 뒤늦게 깨닫고 급히 피하려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잔부상도 입는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우체국의 24년차 집배원 정창수(52)씨는 매일 금곡리·웅담리·직천리 110㎞ 구간을 오가며 하루 1천여가구에 우편물 1200여통, 등기 50여개, 택배 30여개를 배달한다. 하루 3천여가구에 배달하는 도시보다 근무 여건이 나은 편이지만 겨울 빙판길은 더 위협적이다. 폭설이 내린 지난 21일 정씨 오토바이가 살짝 미끄러졌다.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등근육이 뭉쳤다. 2주 전에는 빙판길에서 오토바이째 넘어져 손바닥과 무릎, 팔꿈치에 멍이 들었다. 비포장도로인 시골 빙판길을 바짝 긴장한 채 달리다 보니 어깨저림과 허리통증은 필수다. 정씨는 지난 18일 강원도 화천군에서 집배원 한 명이 중앙선을 침범한 1톤 트럭에 치여 숨진 뒤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는 “아침에 우체국을 나설 때마다 동료들과 ‘오늘도 안전하게 귀국(우체국으로 돌아옴)하자’고 격려하지만 ‘나도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질 않는다”고 말했다.
뾰족한 대책은 없다. 지난해 2월 아내와 사별하고 다섯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김길주씨의 눈길 오토바이 운전 철칙은 ‘안전 또 안전’이다. 여차하면 바닥을 발로 디딜 수 있도록 항상 두 다리를 양쪽으로 내린 채 서행한다. 차선 사이로 곡예운전하지 않고, 한 차선을 통째 차지하고 달리는 것도 김씨의 빙판길 철칙이다.
정창수씨는 얼마 전 “배달하기 어려운 곳은 배달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우정사업본부장이 집배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배달하지 못한 물량은 다음날 배달 물량에 추가되기 때문에 마냥 미룰 순 없다. 미끄럼 방지용 스프레이 체인을 바퀴에 뿌린다. 정씨에게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